[규엘] 스토커 w. BeanVi * 배포 허용(이라 쓰고 환영이라 읽는다) * 블로그 _ http://blog.naver.com/beanvi * 내용/작가이름 수정은 노노합니다. * 그러나 오타수정은 좋아요^O^ 01 "…" 열댓 장정도 되어 보이는 사진을 무표정하게 넘겼다. 다 저의 사진이었다. 아침에 허둥지둥 출근하는 모습,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습,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는 모습, 퇴근하는 모습……. 여러 가지 구도에서, 참 잘도 찍었다. 짜증이 확 차올라 사진 뭉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누군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저에게 사진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정도 되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스토커일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신고해야 하나, 아니면 귀찮으니까 개인적으로 만나 한마디 할까. 하지만 어떻게? 안 그래도 요즘 상사에게 치이고, 후배에게 치여 힘들어 죽을지경인데 왜 모두 저를 못 괴롭혀서 안달일까. 스트레스로 죽어버려야 그만해줄까……. 바닥에 내던졌던 사진들은 대충 발로 방구석에 밀었다. 한 달째 모인 사진들은 양이 꽤 되었기에 명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사진들은 쓸데없이 짐이나 되고. 빨리 스토커 해결하고 저 사진들은 버려야겠다. 머릿속은 이미 짜증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해야만 하는 일들은 아주 많았다. 명수는 깊게 한숨을 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오늘 회사에서 부랴부랴 챙겨온 USB를 꽂는다. 곧 그 파일 속에는 보고받은 통계자료가 뜨고, 그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켜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바쁘게 굴리며 줄만 직직 쳐져 있던 화면을 징그러울 만치 조그만 글씨들로 채워나간다. 그닥 비싸지는 않은 키보드는 뻑뻑한 느낌이 들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뼈가 틀어지는 기분이었다. 타다다닥. 멍하니 키보드 자판을 누르고 있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 스토커는, 어떻게 들키지 않고 그렇게 가까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출퇴근 사진은 저와 한 5미터 멀리서 찍은것같았고, 편의점사진은 2미터 정도였다. 심지어 지하철역에서는 바로 뒤에서. 사진 찍을 때 줌인한 것도 아니다. 바로 뒤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 갑자기 소름이 돋아 명수는 열심히 타이핑하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이 조금은 두렵다. 명수는 작업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진들이 마구잡이로 쌓여있는 방구석으로 걸어갔다. 꽤나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얼굴이 잘 보이는 사진들 앞에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땀 찬 손으로 사진을 한 뭉치 집는다. …이건 아마 퇴근길. 이건 회식 끝나고 집에 걸어갈 때.. 엘리베이터 기다릴 때. 간단히 먹을것을 사 집으로 돌아갈 때. 친구와 함께 술자리를 가질 때……. 대체 어디까지 따라온 걸까. 이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의 사생활은 조금도 없을 것이란 생각에 두려움이 덜컥 몰려왔다. 화도 나고, 짜증도 난다.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걸까, 대체. 신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지금 이렇게 힘들게 유지되어가는 생활을 비틀고 싶지는 않았다. 스토커는 이미 제 생활 속에 당연한듯이 끼어들어왔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저의 심리를 이미 파악중인지도 몰랐다.명수는 손에 쥐었던 사진을 다시 바닥에 던졌다. 천천히 목울대가 넘어간다. 흘끔 올려다본 시곗바늘은, 이미 새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 신경 쓰지 말자. 이미 한 달 남짓 동안 계속되었던 일인데, 갑자기 과민반응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명수는 셔츠 위로 넥타이를 매며, 발로는 흩어져있는 사진 한두 장을 밀었다. 녀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관심을 꺼줘야 할 것 같았다. 이 사진을 보낸 놈이 저의 관심을 받지 않기 위해 보냈다는 것은, 너무 맞지 않는 이야기니까. 명수는 사진들에서 애써 눈을 떼며, 부산스럽게 집을 나왔다. 낮에는 따뜻할지 몰라도, 아직 아침은 쌀쌀했다. 찬 기운에 몸을 움츠리며 빠른 걸음으로 문 열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명수는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지 흘끔 확인하곤 이미 두 명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느릿느릿 바뀌는 층수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명수는 온통 어젯밤 끝내지 못한 문서를 걱정하고 있었다. 사실 당연히 어제 마쳤어야 했는데, 그놈의 스토커 때문에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다 끝내지 못해 한구석이 비었을 파일이 자꾸 신경 쓰인다. 회사에 가는 길에 한번 시도해볼까. …아,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았다. 아니다, 스마트폰으로 문서수정을... 아니지, 휴대폰과 USB를 연결할수가 없지. PC방에 들러 파일을 메일함에 저장해둘까? 아, 젠장할. 출근길가까이 PC방이 없잖아. 머릿속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다. 출근길에 문서를 완성하는 것은 그냥 포기하기로 한다. 가자마자 바로 끝내서 제출하면 되겠지 뭐. 그렇게 생각은 해도, 자꾸만 한쪽에 남아있는 찜찜함이 명수를 짜증나게 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렸다. 다시금 찬 기운이 옷 속을 파고든다. 으으. 명수는 그 찬 기운에 짜증이 배가 되는 것 같아 인상을 확 찌푸리며 아파트를 나왔다. 서둘러, 하지만 주변 상사들의 눈초리를 받지 않도록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와 앉는다. 오자마자 하는 일은 당연히 컴퓨터부터 켜는 일이었다. 먼저 전원버튼부터 누른 후, 의자를 쭉 빼고 앉아 챙겨온 USB를 꺼낸다. 역시 회사 컴퓨터라 그런지 속도가 빠른 편이다. 명수는 부팅이 완료된 컴퓨터에 서둘러 USB를 꽂고 파일을 켰다. 빼곡히 채워진 검은 글자들 사이로 흰 공백부분이 눈에 뜨인다. 명수는 서둘러 통계자료를 켠후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명수씨 아침부터 열심히네-" "…네? ..아, 씨.. 놀랐잖아." 놀랄필요가 뭐있냐? 뭐 찔리는 거 있어? …아니야. …보아하니 너 이거 어제까지 다 해야 하는 거였구나? ……. 내 그럴 줄 알았다. 제 책상 위로 짐을 푸는 내내 명수에게 깐족거리던 성열이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는다. 그러는 저도 앉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곧이어 타자 소리가 나는걸 보니 어제 뭔가를 끝내지 못한 게 분명하다. 명수는 옆자리 성열의 부산한 타자 소리에 피식 웃으며 문서를 채워갔다. 나란히 위치한 책상에서 계속 타자 소리가 나니 가관이었다. 그래도 어제 거의 다 해놔서, 할건 별로 없다. … 다했다. 공백 면을 다 채우자마자 부산한 손놀림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파일을 잽싸게 저장하고, 이메일부터 켰다. 팀장은 꼭 종이를 낭비할 필요가 있느냐며 늘 이메일로 제출하는 것을 선호했다. 저도 귀찮게 인쇄할 필요 없으니 좋기는 했다. 받는 사람 란에 익숙한 팀장의 이메일을 치고, 문서를 첨부했다. 그리고 보내기. 크으, 오늘 아침 했던 온갖 근심이 다 풀리는 기분이다. 한층 긴장이 풀린 명수가 등받이에 기대었다. 아직도 손이 빠져라 타이핑중인 성열을 슬쩍 비웃어주며 받은 메일함에 들어갔다. 확인하지 않은 메일이 늘 없게 하는 것은 습관같은 것이었다. 아래서 부터 잔뜩쌓인 광고메일들을 눈으로 쭉 훑다가, '사진' 이라는 제목의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그냥, 사진? 뭐, 어떤 사원이 자료로 보냈던 것인가 싶어 확인하려던 찰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보낸 이가, 저가 만들어둔 또 다른 아이디였다. 그 아이디는 옛날에 만들어두곤 쓰지도 않는 거라 최근에 들어간 적이 전혀 없다. 누구 지인에게 알려준 적도 없고.. 해킹당했나? 정말 그런 거라면 이 기회에 탈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선 메일을 열었다. "…" …… 뭐야, 이거... 평범한 해킹이 아니었다. 조금 느린 속도로 메일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자, 잠시 잊고 있었던 공포가 다시 몸을 타고 오른다. 메일 속 잔뜩 첨부된 것은 다름 아닌 저의 사진들이었고, 사진들 아래에는 짤막한 글이 쓰여 있었다. … 분명 그 스토커의 짓이 틀림없다. 명수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짚은 채 서둘러 스크롤을 내렸다. 그놈이 찍은 사진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글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내 그 글을 읽은 명수의 얼굴은 경악에 차올랐다. '요즘 피곤해보여. 사귈 때는 잘 웃었잖아. 오늘 가는 길에 웃으면 예쁘게 찍어줄게.' 순간 호흡이 멈출 정도로 무서움을 느꼈다. 스토커가 제 계정을 해킹해 또 다른 계정으로 메일을 보냈다는 사실과 저의 옛 애인이라는 사실이 합쳐져 너무 큰 충격으로 떨어졌다. 최대한 관심 끄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그럴 수가 없다. 메일은, 삭제했다. 명수는 옆자리 성열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가빠진 숨을 고르며 포스트잇을 한 장 뜯는다. 그리고 예전 학창시절부터, 아주 잠깐이라도 연이 닿았던 사람들은 다 떠올려보았다. …대학생 때, 잠깐 사귀었던 김성규 선배. 저를 너무 과격하게 대했던 사람이었다. 표현도 없었고, 메마른 연애만 하다가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는 지금, 저가 속한 팀의 팀장이었다. 그리고… 또 대학생 때 사귀었던 남우현 선배. 좀 집착 있는 선배였다. 저의 뒷조사도 다 하고 다니고, 계정들도 다 꿰뚫고 있었기에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의심 가는 사람이다. 포스트잇에 이름을 쓰고, 아래에 주욱 줄을 긋는다. 그리고 대학생 때, 동아리에 들었다가 풋풋하게 사귀었던 장동우 선배가 있다. 정말 풋풋했고, 전에 해왔던 것들과 다르게 깨끗한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그닥, 의심이 가는 선배는 아니다. 이번에는 그의 이름 위에 엑스 표를 했다. 돌이켜보면 다 좋은 추억들 뿐이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좋은 형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기도 하고. 그리고 계속 쓸까 하다가, 그냥 펜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눈으로 세 명의 이름을 쭈욱 훑었다. 간간히 나쁜 기억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좋은 추억들이었고, 행복한 기억들인데 이렇게 단체로 의심하는 것도 좀 그렇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세상 모든 것 다 줄 것처럼 웃던 그들이 이런 무서운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심이 핀다. 포스트잇은 잘 안 보이는 곳에 숨겨두고, 메일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쭉 나열된 사진을 보고 있자니 역겹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저를 따라다니고 있는 그 사람이. 메일까지 보내서 저를 공포에 떨게 하는 그 사람이.. * "명수, 괜찮아?" "…어?" "애가 다 죽어간다, 죽어가. 아침만 해도 괜찮더니만. 정신 차려." 아,응... 성열을 바라보던 눈동자를 다시 내리고 모니터에 꽂는다. 성열은 반쯤은 정신나간채 일하고있는 명수를 못마땅한 듯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팔을 잡고 일으킨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자. …괜찮은데.. 조그만 명수의 중얼거림은 못 들은 척하고,성열은 명수를 이끌고 무작정 걸어갔다. 손에 꼭 쥔 자판기 커피가 따뜻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또 중간에 나오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지 벌써 재잘거리는 성열에 명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엔 둘이 만나서 많이 하던 팀장에 대한 욕이다. 싸가지 없는 성격에 맨날 심부름만 시킨다고 입사 초기에는 입이 빠져나가라 욕을 해댔었다. 명수도 대학생 때의 연애 때문에 성규에게 조금 악감정이 있었는지라, 열심히 대꾸해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틈도 없이 바빴던 것 같다……. "명수,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 "말을 해봐, 말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딱히 받아치지 않는 명수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성열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역시, 어떤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이 틀림없다. "…" 명수가 망설이는 동안, 아래로 살짝 땀이 찬 머리칼 사이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여기가 사내 흡연자들이 몰리는 곳이라 바람이 부니 벽에서 담배 쩔은내가 나는 기분이었다. 성열은 그 냄새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명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인다. 혹시나 지금 이장면도, 그놈이 찍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성열과 대화를 나누는 이 모습을. 메일을 본 이후로 상상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생각의 방향은 계속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혹시 도청기를 어딘가에 붙여놓지는 않았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놈이다. 누구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미 저의 계정도 알아내었고, 집 주소도 기본으로 알고 있다. 저의 직장도, 자주 가는 편의점도, 이용하는 지하철역도. 두렵다. 지금 그놈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제 뒤에 있을지, 저를 보고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있잖아." "응." 성열이 눈을 빛내며 명수를 바라본다. 원래 이렇게 시체처럼 다니지는 않던 녀석이 갑자기 이러니 궁금해 미칠 지경인 듯, 명수의 망설이는 입술이 열리기만을 눈을 번뜩이며 보고 있다. 그러나 성열의 기대와는 달리, 망설이던 입술은 꾹 다물렸다. 지금 말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아서. "…아니다, 그냥.." "아 진짜,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써줘서 고맙다." 명수는 성열에게 고맙다는 듯 살짝 웃어 보인 후,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올려져 있는 명수의 커피는 반도 비지 않았다. * 종일 정신을 놓고 일했다면 야근까지 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오후부터는 정신을 차려 그것만큼은 면했다. 오늘 전체회식이 있다는 소식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빠졌다. 하마터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려갈 뻔했지만, 성열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늘 혼자 가는 퇴근길이건만,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다. 아직은 그래도 해가 길어 밤이 되지는 않았지만, 미치도록 두려웠다. 멀쩡히 길을 가다가도 홱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데. 분명히. 명수는 아무 데나 가까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알바생 빼고는 아무도 없다. 명수는 대충 컵라면 하나를 손에 집으며, 시선은 편의점 입구와 밖이 훤히 보이는 큰 유리창에 고정했다. 여전히 아무도 없다. 들어오는 사람 한 명 없고, 밖에도 지나가는 사람들뿐이다. 그래, 이러면 못 찍겠지. 보고 있으면 아무리 그놈이라도 몰래 찍지 못하겠지. 명수가 다급한 손길로 컵라면을 계산한 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서둘러 편의점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슬슬 해가 져가고,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는 명수의 발걸음은 끝없이 빨라져 갔다. 허억, 헉... 어쩌다 보니 마지막엔 뛰어오게 되었다.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숨을 골랐다. 오는 동안에 카메라나 휴대폰을 꺼내 든다거나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 오늘은 한 장도 찍지 못했겠지.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는 명수의 눈에 우편함에 꽂힌 흰 봉투가 눈에 들어온다. 한 달 동안 명수를 괴롭힌, 그놈의 사진이 든 봉투. 명수는 천천히 우편함으로 걸어가 흰 봉투를 뽑았다. 그리고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서둘러 탔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명수는 자신의 층수를 누르고 흰 봉투를 조심스레 뜯었다. 늘 그렇듯 두툼하게 들어있는 사진들. 손가락을 넣어 사진들을 빼내었다. 빈 봉투는 주머니에 구겨 넣고, 우선 사진의 숫자부터 세었다. 정확히 열 장. 아무래도 놈은 늘 사진열장을 보내오는 듯 했다. 침을 꼴깍 넘기며 사진들을 한 장씩 넘겼다. 택시에서 내리는 사진. 길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사진.. 떨어뜨린 휴대폰을 다시 줍는 사진……. 그리고 공포스럽게도, 엘리베이터 안에 서서 버튼을 누르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 그놈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순간 몸을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어렵사리 다리를 움직여 내렸다. 엘리베이터안 자신이 찍힌 사진이 들린 손은, 이미 힘이 다 풀려버려 사진들이 아슬아슬하게 집혀져 있었다. "…" "…아, 죄송합니다." 지나가면서 실수로 제 어깨를 친 남자에, 손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사진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명수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주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벽을 짚은 채 숨을 골랐다. 자꾸만 끔찍한 두려움이 저를 잠식해왔다. 감시당한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다. 누군가 지켜본다는 게, 이렇게 끔찍한 것이였을 줄은 몰랐다. 남자는 어느새 사진을 모두 주워 명수의 손에 쥐여주곤 엘리베이터에 탔다. 명수는 공허하게 제 손의 사진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보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의 문은 닫혔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꼼꼼히 잠근 뒤 침대에 앉아 다시 사진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장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한장, 두장… 열 번째 사진을 넘기자, 그아래로 조그만 폴라로이드 사진이 드러났다. 이상했다. 아까 사진 수를 셀 때만 해도 이런 건 없었다. 명수는 그 사진을 들고, 들여다보았다. 컵라면을 고르는 저의 모습을 편의점 밖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너무 무서워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뒤집어 사진의 뒷면을 보았다. 뒷면에는, 펜으로 휘갈긴듯한 글씨가 쓰여있다. -갑자기 그러면, 좋은사진 찍기가 힘든데. … 아.. 아아.... 폴라로이드 사진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열한 번째 사진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건, 중간에 누군가가 사진을 추가했다는 것이고 그럴 사람은 방금 복도에서 마주친 남자뿐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고 소름 끼쳤다. 미치도록 치밀한 놈이었다, 녀석은. 놈이 부딫혔을때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목소리가 기억날리 없다. 손에 들려있던 나머지 열 장의 사진들도 모두 내던졌다. 그리고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만, 그만해줘. 제발. 02 더 이상 단잠을 잘 수 없도록 잠이 깨버렸다는 사실에 짜증 담긴 날숨이 잇새 사이로 빠져나왔다. 한참을 몸을 뒤집으며 뒤척이다가, 결국 똑바로 누워 이불을 끌어안았다. 눈을 뜨고서도 한참 동안을 시곗바늘 소리를 들으며 집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오래 자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평일이었다면 또 출근을 해야 했을 것이고, 어디선가 놈과 지나쳤을 것이며 저의 모습이 몇 장 더 찍혔을것이다. …정말 싫다. 그래도 하루종일 누워있을 수만은 없으니 느릿느릿 일어났다. 잠을 잘못 잔 모양인지 허리가 심하게 쑤셔왔다. 으으, 하는 고통 섞인 신음이 절로 나왔다. 명수는 벽을 애써 짚으며 걸어가 바닥에 던져둔 컵라면을 주웠다. 입맛이 없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배가 고프다. 식탁에 대충 뜯은 컵라면을 탁, 올려놓고 커피포트를 켰다. 치익 하면서 물이 데워지는 소리가 들렸고, 명수는 허리를 짚은 채 천천히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잠을 잘못 자도, 허리가 이렇게 아플수 있나 싶다. 멍하니 잡생각을 하며 앉아있는데, 탁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포트가 꺼졌다. 명수가 의자에서 일어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또 멍때리다가 선을 조금 넘어버렸다. 에이씨, 짜증나. 컵라면은 조금만 넘쳐도 뭔가 아쉬운데. 짜증을 내며 컵라면 뚜껑을 덮고 젓가락을 올려두었다. 아, 배고파- 따뜻한 컵라면의 옆면을 검지손가락 끝으로 쓸며 멍하니 컵라면 옆에 써있는 글을 읽었다. 조리방법. 성분. 뭐, 맛의 기원 어쩌고.. 무료한 표정으로 컵라면을 돌린다. 뜨거운 열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돌려 드러난 반대편에는, 별다른 글귀가 없었다. 그대신 딱봐도 펜으로 쓴듯한 글씨가 보인다. 명수는, 덜컥 두려움이 들면서도 그것을 읽었다. -바로 먹지도 않을 거면서, 왜 산 거야. "…" 후욱, 깊은숨을 내쉬었다. 하다 하다, 주거침입이라니. 왠지 컵라면 비닐이 뜯어져 있다 했어. …이건 너무 심하잖아. 명수는 메스꺼워지는 속을 애써 참았다. 토할 것 같아. 그러면, 혹시 허리가 아픈 이유도.. 그것만은 차마 받아들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컵라면은 버렸다. 그놈의 손을 탄 컵라면 따위, 입에 대고 싶지도 않았다. 명수는 당장 모자를 눌러쓰고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에는 사진을 몽땅 쑤셔 넣고, 당장 나갈 채비를 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신고해 버리겠어. 정말로. 이젠 뭐 생활이 비틀어진다느니, 하는건 따지지 않기로 했다. 주거침입은 심각했다. 명수는 단단히 결심하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분명히 잠금을 푼 뒤 문고리를 비틀고 밀었는데도, 문을 열릴 생각을 않았다. 당황한 명수가 눈을 도르르 굴렸다. 문에 무슨 이상이 있나, 싶어 도어락을 몇 번 잠갔다 풀어보지만,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달칵달칵, 거칠게 문고리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대체. 혹시 누가 밖에서 막아둔 건가. 혹시 그놈이.. 또다시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현관문에서 물러나는데, 주머니에서 갑작스레 진동이 느껴졌다. 명수는 크게 흠칫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고, 처음 보는 번호가 눈에 띄었다. 명수는 공허한 눈으로 그 번호를 쭉 훑다가, 전화를 받고 슬며시 귀에 대었다. 미미한 잡음이 귀를 파고든다. -신고하려는 거야? "…" -그런 거라면, 지금당장 들어 갈거야. "…누구야, 너." -신고할 거야, 안할 거야? "누구냐고, 묻잖아." -… 목소리가 절로 덜덜 떨린다. 변조된듯한 반대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귀를 바짝 기울여야 숨소리나 간간히 들렸다. 그렇게 침묵이 한참 동안 유지되던 도중, 덜컥. 하는 소리에 명수는 비명을 지르려는 제 입을 막았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려고 들었다. 이번에는 비밀번호를 누르는 기계음이 들렸고, 다음에는 초인종을 연달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치밀하게도 인터폰 카메라는 손가락으로 가린 모양이었다. 명수는 벌벌 떨며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몸을 웅크려도 소리는 정확히 들렸다. 귀를 찌르는 시끄러운 소리가 자꾸 그를 괴롭힌다.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결국, 귀를 틀어막고 소리쳤다. 울분 가득한 목소리에 그 시끄럽던 소리도 멈추었다. 명수는 재빨리 아직 통화 중인 휴대폰을 들어 귀를 대었다. 다시금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신고 안 하는 거지? "안 할게, 안 할게.." -그래, 착하다 우리 명수. 반대편에서 조용히 웃는 소리가 들린다. 명수는 공포에 떠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복도에서 걷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 같다. * 주린 배를 쥐어 잡았다. 식욕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신고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놈이 쳐들어올 것 같았다. 아무나 부르고 싶다. 그저, 같이 있고 싶다. 놈의 시선 속에서 혼자 있기가 미치도록 무섭다. 명수는 조심스레 일어나, 인터폰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화면을 켜는 버튼을 조심스레 꾹 누르니, 화면에는 텅 빈 복도의 모습이 떴다. 아무도, 없는건가, 정말.. 명수는 손을 내리고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열릴까. 아까는 놈이 막고 있었을 터였고, 이제는 갔으니 아마 열리겠지. 그는 조심스레 문고리에 손을 얹고, 소리 없이 내렸다. 동시에 도어락이 풀린 문은 부드러이 열렸고, 늘 그렇듯 잘만 열렸다. 문이 잘 열림을 확인한 그는 재빨리 문을 도로 닫았다. 간단한 기계음이 문이 잠김을 말해주었고, 그는 그제야 안심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샌가 숨이 빨라져 있었다. 허리는, 여전히 찌르르한 고통을 주고 있었다. ..오늘은, 남의 집에 가서 잘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명수가 벌떡 일어났다. 놈도 갔겠다, 이렇게 혼자 집에서 떨고 있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을 만나, 고민도 털어놓고 함께 있는 게 몇 배는 안전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라면 신고하러 갈 수도 있을것같고. 이미 나갈채비는 마친지 오래니 바로 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물씬 파고들어 왔다. 후우, 소리 없이 숨을 내뱉은 그가 문을 완전히 열고 복도에 발을 디뎠다. 텅 빈 복도는, 늘 보는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이질감을 풍겼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전화번호들을 뒤졌다. 갈만한 집이, 어디 있을까. 하룻밤정돈 충분히 재워줄 수 있는 집과 친밀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명수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맞는 층수의 버튼을 누르고, 다시 전화번호들을 넘겼다. 쭉 내리던 엄지손가락이 멈춘다. 장동우, 라는 이름이 눈에 뜨인다.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저의 부탁을 들어줄것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멈추었고, 그는 거기에서 내리면서 동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은 귀에 바짝 대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혹시라도 놈이 있을까, 한시라도 맘 편히 서 있지를 못하겠다. 명수는 아픈 허리를 꾹 참고 걸음을 빨리했다. 연결음이 꽤나 오랫동안 이어질 동안 그는 아파트를 완전히 나왔다. -여보세요? "동우 형, 나 명수." -알아 알아, 무슨 일이야? "형 어디야?" -나 잠깐 나와 있어, 출장 왔거든. "아, 출장.." 왜, 무슨 일인데. 아니야, 아무것도. 출장 잘 다녀와, 나중에 얼굴 한번 보자. 그대로 전화를 끊는다. 집에 있었다면 분명히 재워줄 사람이었는데, 좀 아쉬웠던 건 사실이다. 명수는 신호에 걸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성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나마 사내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니까, 그 정도 호의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제 술이라도 잔뜩 퍼마신 건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걸 수도 있다. 명수는 한숨을 쉬며 다음 사람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김성규 팀장은 좀 아닌 것 같았다. 팀장에게, 갑자기 저 좀 재워주세요 라니. 것보다 어색한 상황은 없을 것 같다. 망설여졌다. 어느새 신호는 바뀌었고, 그는 건널목을 건넜다. 친구들은 다 고향에 있고, 여기에는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터라 친구도 없다. 무작정 나온 것에 후회도 좀 되었다. 명수는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전화번호들을 찾아보다가, 제 앞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다. 제 앞에 서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김명수, 맞네." "어, 팀장님.." 놀라 절로 어버버 거렸다. 평소와는 달리 평범한 옷을 입은 그는, 반갑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명수는 재워달라는 말을 할까, 말까 한참 동안 망설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규는 그에게 물었다. 어디가, 김명수씨?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뭐야, 그럼 밥 한끼 사줄까?" "…아, 네." 한시간이라도 같이 있어줄 사람이 생겼으니 되었다. 성규는, 명수를 이끌고 마침 밥먹을 사람 없었는데 다행이라며 한 식당으로 향했다. 명수는 어색하게 그의 옆을 따르다가, 최대한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 ..기분탓, 이려나. "감사합니다, 팀장님." "뭐가." "같이 있어 주셔서요." 혼자 있기 싫어서 나온 건데, 같이 있어줄 만한 사람이 없더라구요. 젓가락으로 면을 집던 성규가 피식 웃는다. 김명수 너가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 있지도 못해? 그냥, 그럴만한 일이 좀 있었거든요. 명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젓가락으로 면을 헤집었다. 면은 불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은, 할만해?" "네, 뭐. 조금 피곤한 것 빼고는요." "사실 김명수 너가 이 회사에 입사했다고 인사했을때, 표정관리가 좀 힘들더라고.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추억 팔이 하듯, 성규는 남의 얘기 하는 것처럼 말했다. 명수는 사내와 달리 반말로 바뀐 그의 말에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익숙했고, 자연스러웠다. 눈을 내리깐 채 면을 입 안에 넣는 성규는 명수의 대답을 딱히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명수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식당에 유리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다. 성규는 고개를 들고 명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 뭐 신경 쓰이는 거 있어?" "아녜요, 딱히." "…"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명수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명수는 괜히 애가 탄다. 뒤에 놈이 나타날 것만 같아서, 좀 불안한 바 있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식사를 마쳤다. 식당을 나오니 시간이 얼마 지나있지도 않았다. 그저 해의 위치와 그림자의 길이만 조금 바뀌어있는 듯 했다. 명수는 옆에 서 있는 성규를 흘끗 보았다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집에 가야 하나. "밥 잘 먹었어요." "나야말로." 이제 어디 갈 거야? 글쎄요, 이제 친구한테 다시 전화해봐야겠네요. ..그래. 공허히 그를 내려다보던 성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는 괜시리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성열이, 전화를 받을까. 그런데 받는다고 해도 과연 그가.. "근데, 친구는 왜 만나는데. 혼자 있기 싫어서?" "아무래도." "어린애네." 명수를 깔보듯 말하던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 집 올래? 그렇게 무서우면 재워줄 수도 있는데. 그의 말에 고민하던 명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재워주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성규의 표정이 티 나지 않게 일그러진다. 방금까지 누구라도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성규는 고맙게도 먼저 재워주겠다고 말했지만, 뭐랄까, 내키지가 않았다. 그의 집에 간다고 해서 안심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이다. 너무, 어색한 시간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이만 가볼게." "네, 고마웠어요." 김..팀장님. 김 팀장, 이라는 말에 성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규는 등을 지고 멀어졌고, 명수는 시간을 잠깐 보았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뒤돌아 가는 성규만이 보였다. 지잉,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내 든다. 부재중이 온 것을 확인한 모양인지 성열의 전화가 오는 중이었다. 명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예상대로 숙취에 빌빌거렸다. -아, 명수. 전화했던데. 무슨일있어? "응.. 목소리가 안 좋네." -어제 새벽까지 퍼마셨거든. 왜 전화했냐니깐. "너희 집 가도 돼?" -갑자기, 웬일이래. 그냥.. 나 좀 재워줘. 큭, 재워달라구? 그래, 와. 우리 집 어딘지 알아? 알지, 그럼. 지금 가도 돼? 어어, 지금 와. 흔쾌히 허락해준 성열에, 명수는 고맙다는 말을 짧게 남긴 뒤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미끄러지듯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뒤 빠른 걸음으로 성열의 집으로 향했다. 전에 한번 가봤던 그의 집은 조금 가물가물했지만, 그래도 찾아갈 만 했다. 명수는 검정색 모자를 고쳐쓴 뒤 모퉁이를 지났다. * 그의 집에서는 술 냄새가 풍겼다. 아직 술이 다 깨지 않았는지 성열은 빌빌거리며 문을 열어주었다. 머뭇머뭇 들어선 명수는 바로 침대에 드러눕는 성열의 곁에 걸터앉았다. 그의 침실은 해가 잘 들었고,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지경이었다. 편한 차림으로 이불 위에서 웅얼거리던 그는 명수를 툭, 치며 말했다. 명수, 나 보고 싶어서 왔어? "응." "정말?" "그래." 크큭, 하는 웃음소리가 개구지다. 머리를 살짝 털고 일어난 성열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걸터앉아 저를 올려다보는 명수의 정수리를 스윽 하고 쓰다듬더니, 침실을 나간다. 밥은 먹었어? 하는 물음에 먹었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뭘 먹었냐는 가벼운 물음이 돌아온다. "그냥, 밖에서 김 팀장 만났어." "김성규?" "어. 그래서 같이 간단히 밥이나 먹었지 뭐." 성열의 표정이 어딘가 께름칙하다. 성규가 어지간히 싫은가보다. 명수는 일어나 성열을 따라 나와서는, 그래도 체는 안했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명수는 거실 소파에 편히 앉아 멍하니 베란다 밖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뻥 뚫린 거실 한 면은, 만일 저의 집에 있었다면 좀 무서웠을 것 같은 구조였다. 왜냐, 당연히 스토커 놈 때문에. 명수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여기에 오니까 좀 안심이 되었다. 성열의 집이니까. 그나마.. 편한 사람과 함께 있으니까, 스토커 따위 다가오지 못할 것 같았다. 촤악,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성열이 씻는 소리를 들으며, 명수는 소파에 편안히 기대었다. 푹신하게 몸을 받치는 느낌이 좋다. 나른한 느낌에 모자를 벗고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차가운 인조가죽에 뺨이 닿는다. 꿈벅, 꿈벅 감았다 뜨던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 "너 잠들었더라." "아.." 기껏 씻고 나왔는데, 오자마자 자고 있으면 어떡하냐. 성열의 투덜거림에 명수는 어느 샌가부터 누워있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의 성열은, 명수를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에 왜, 하고 묻지만 성열은 푸스스 웃기만 하며 답을 해주지 않았다. 속 쓰려서 해장국 좀 끓였는데, 너도 먹을래? 아니, 배 안 고파. 그래, 그럼 나 먹고 올게. 명수는 아직 잠이 덜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성열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알았지만, 집안에는 칼칼한 찌개냄새가 풍겼다. 그 딴에는 냄새를 뺀다고 뺀것 같긴 하지만서도. 명수는 식탁으로 걸어가 앉는 성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 그에게로 향했다. "왜, 나 먹는 거 보니 또 먹고 싶어졌어?" 장난스레 묻는 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대신 성열의 옆자리에 앉는다. 너 말동무 해주려구, 하는 말에 성열이 씨익 웃었다. 그래, 고맙다. 해장국은 건더기가 많지 않았다. 그는 그저 국물을 마실 의도로 끓인 모양이었다. 반투명한 붉은빛의 국물은 매워 보인다. "근데, 무슨 일 있어?" "응?" "너, 원래 집에 잘 안 오잖아. 서로 귀찮다고." "그렇긴 하지." 그럴만하다. 애당초 잘 남의 집에 놀러 가지 않기도 하고, 남을 들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던 저였다. 그러니 꽤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성열이 걱정할 만도 했다. 명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성열을 달랬고, 성열도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어봤자, 한번 발뺌한 이상 말하지 않을 그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어제 장난 아니게 마셨나봐." "나 튀었다가 뒤늦게 회식 끌려갔잖아. 적어도 3차에서는 나왔어야 했는데, 자꾸 붙잡고 안 놓아주는 거 있지." "맞다, 어제 회식이었구나." "응, 넌 내덕분에 빠졌잖아." 고마워 해야 한다니까. 어젠 여직원들도 빠지기 힘들었다고. 난 걸려서 붙잡혀 가기까지 했다니까? 성열의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너 아니었음 오늘 나오지도 못했겠다. 그래, 너 나보다 술도 약하잖아 그러고보니. "그래서 어제는 푹 쉬었어? 종일 비실비실하더니만." "잘 쉰다 해도, 뭐.." 어차피 스토커 놈 때문에 피로가 확 쌓이는데, 쉬어봤자 뭐하겠는가, 하는 심정에 억울하다. 그래도 애써 성열에게는 웃어 보였다. 그에게 한번 걱정거리가 붙잡히면, 그는 그것이 해결될때까지 도통 놓아주지 않으니까. 그또한 피곤하게 만들어버리는 셈이다. 어중간하게 끌어진 말꼬리에도 성열은 딱히 이상한점을 느끼지 못한듯했다. 성열은 더 이상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명수 또한 매한가지였다. 명수는 그저 멍하니 식어가는 국을 바라본다. 안 보려고 해도 자꾸 눈길이 가는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는,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스토커가 바라보기 딱 좋을 것 같은 장소. 명수는 티나지않게 몸을 움츠렸다. 분명 성열의 집에 있는데도, 이렇게 무서운 이유는 무엇일까. 둘이서 할 것은 별로 없었다.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아 볼까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아까도 생각했다시피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서로가 꽤 피곤한 일이다. 그렇게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 해가 다 지고 침대에 함께 누워서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실감 났다. 옆자리에서 벌써 새근대는 숨소리를 내는 그는, 잠든 모양이었다. 명수는 멍하니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고 있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여기는, 못 들어오겠지. 아무리 끈질긴 그놈이라도… 이불을 끌어 올려 목까지 덮었다. 내일이면 그 지옥 같은 집에 돌아가야 한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신고를 해야 할 것만 같다. 집에 가서 증거를 챙겨온 뒤 경찰서로 갈까. 그럼 놈이 또 귀신같이 알고 쫒아오는 건 아닐까. 너무, 무섭다. 잊고 있던 허리의 통증이 약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잊으려 눈을 감는다. 내일은, 더는 놈에게 농락당하지 말아야 한다. 놈은 저를 쉽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더군나나 오늘 아침의 일은, 놈이 정말로 저를 깔보게 생각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지 않았나 싶다.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을 주니 파르르 떨린다. 다시금 눈을 뜨니 달빛이 더 밝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03 성열이 아침부터 가야 할 곳이 있었던 탓에, 명수는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피로감이 채 다 풀리지도 않은 무거운 몸은 말을 잘 따라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익숙한 복도에 들어섰다. 그곳은 늘 그렇듯 서늘하다.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진다. 명수는 걸음을 빨리했다. 놈이 몇 번 지났을 길이기에, 집 다음으로 께름칙한 장소였다. 현관문 앞에 섰다. 푸욱 한숨을 쉬었다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비밀번호도 바꾸지 않았다. 경찰서에 다녀온 뒤 곧장 바꿔야겠다. 우선 들어가자마자 사진들을 챙기고, 메일내용도 증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저번의 컵라면은.. 버렸지만, 일단 찾아보기는 해야겠다. 그리고 뭐가 있지. 완전히 문이 열리고 안으로 급히 들어섰다. 쾅, 문을 닫고 문이 잠긴 것부터 확인했다. 완벽히 확인하고 나서야, 명수는 신발을 벗고 거실 한구석으로 향했다. 어제, 사진을 넣었던 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명수는 그것을 집어 들었고, 가방은 텅 비어있었다. 잠시동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놈이 들어올 수도 있겠다고 아예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을 몽땅 가져갈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명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주저앉아 가방을 털었다. 아무리 탈탈 털어도 나오는 건 먼지뿐. 그는 울상을 지었다. 이제, 신고할 방법도 없는건가. 절망에 잠겨 앉아있는데, 똑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명수는 숨을 턱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 번의 두드림 뒤에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는 숨소리조차 내질 않았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조용히, 아주 조용히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문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정적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명수는 발뒤꿈치를 슬며시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조용히 인터폰으로 손을 뻗었다. 놈이 모르게 카메라를 켠다면, 얼굴을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문하나 너머로 그놈과 서 있다고 생각하니 주저앉을 것 같지만 애써 버티고 섰다. 카메라를 켜면, 바깥에 있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올 것이고, 그렇다면 놈도 눈치챌것이다. 하지만, 놈의 얼굴을 볼수있다면… 터치식인 버튼에 손가락을 대었다. 1초 정도 후, 화면이 떴다. 하지만, 놈은 이미 카메라를 막고 있었다. 젠장, 명수는 서둘러 인터폰에서 물러났다. 놈이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것이 틀림없다. 거침없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명수는 하얗게 질려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숨어야 했다. 놈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베란다가 있는 드레스룸은, 딱히 옷으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니었지만, 옷장이 두 개나 들어서서 가득 차 보였다. 그는 둘 중 하나의 옷장을 열고 뛰어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하게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 그리고 작게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명수는 숨을 참은 채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비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타박거리는 발소리도 들렸다. 옷장 문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놈은, 왜 집에 들어온 걸까. 무엇이 목적일까. 두드려놓고도 한참동안 조용히 기다린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한것이 많지만 일단은 묻어둔다. 성열은 갈곳이 있다고 했으니, 바로 오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아무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하다. 놈이 집에 눌러앉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한번은, 놈에게 한번 달려들어 볼까 하는 무모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곧, 그는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옷장 문을 연다. 고개를 내미는 순간 드레스룸 문앞을 지나는 놈의 뒷모습이 보였다. 명수는 조용히 옷장에서 나와, 놈에게 향했다. 무기가 필요하려나? 아니면, 얼굴만 보고 도망쳐? 비명을 질러야 하나? 속으로 엄청 갈등하며, 그는 드레스룸 밖으로 뛰쳐나와, 놈에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달려드는 명수에, 남자는 뒤돌면서 뒤로 쓰러졌다. "…"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명수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애써 세우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곧, 경악에 찼다. 제 아래에서 아픈 듯 인상을 확 찌푸린 그 사람은, "아 씨, 뭐야.. 집에 있었어?" "..팀장..니임.." 짜증을 내며 저를 밀어내는 사람은 분명 성규였다. 명수는 사색이 되어 그에게서 물러났다. 팀장님이, 스토커에요? 라는 말에 어이없다는듯 쳐다본다. 뭔 스토커야, 뜬금없이. 이거 가져다주러 왔거든. 명수가 몸은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재빨리 내려 그가 내민 손을 쳐다보았다. 성규가 내민 것은, 저의 휴대폰이었다. "..이게 왜 팀장님한테 있어요?" "어제, 우리 밥먹고 너 뛰어가는데 떨어뜨렸어. 무슨 소리 들려서 뒤돌아봤더니 뛰어가고 있드만. 휴대폰은 길바닥에 덩그러니 떨어뜨려놓고." "..." "주려고 어제 왔었는데, 없더라고. 그래서 오늘 왔지. 이거 없으면 월요일에 너가 좀 불편할 것 같기도 했고." "아.." 뭐, 집에 마음대로 들어온 건 미안하게 생각해. 근데 오늘 또 돌아가기에는 너무 귀찮았어서. 어차피 비밀번호도 대학생 때부터 알고 있었고.. 그럼, 인터폰 카메라는 왜 가렸어요? 카메라? 몰라, 움직이다가 머리로 가렸다거나 했나봐. 성규의 말에 벙찌는 그다. 들을수록 오히려 저가 고마워해야 할 상황인것 같아 더 이상 의심도 못하겠다. 명수의 표정을 본 성규는 한숨을 푹 쉬며 넘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그거 줬으니까, 난 간다. "그, 팀장님." "왜." ".. 죄송해요, 요즘 좀 심란해서." "뭐, 스토커 라던가 하는 놈이 따라다녀?" "…" "..진짠가보네." 성규는 그렇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다. 너 언젠가는 그럴 것 같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긴 했어. 너, 대학생 때부터 여자든 남자든 인기 많았잖아. 명수는 울상을 짓는다. 몰라요, 어쨌든 좀 도와주세요, 팀장님. 무서워 죽을 것 같아요.. 명수의 눈에 맑게 고이는 눈물에, 성규는 한숨을 푹 쉬었다. 늘 동정심 같은 거 안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누군가의 눈물을 보면 흔들리는 게 어쩔수 없는 것 같다. 성규는 조용히 명수의 앞에 앉았다. 명수는 어지간히 무서웠는지, 아님 이제간의 설움이 터졌는지 닭똥같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으아앙, 하는 아이같은 울음소리에 성규는 명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성규의 어깨가 젖어갔다. 명수는 성규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놓아줄 생각을 않았다. "..그렇게 무서웠어?" "네에, 맨날 사진 보내고, 밤에 들어오고.. 어제는 집에 막 들어오려고 했어요. 신고하면, 들어갈 거라면서.."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안쓰러우면서도 아이같아 귀엽다. 성규는 저를 꼭 붙잡은 명수를 떼어내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눈물범벅인 얼굴이 가엾다. 성규는 그에게, 당장 신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명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증거는, 있어?" "있었는데, 놈이 다 가져갔어요. 오늘 집에 오니까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거 있죠.. 아마, 증거 될만한 것들은 다 가져갔을 거에요." 그의 목소리가 우울하다. 성규는, 명수의 어깨를 찬찬히 쓸어주며 그를 안심시켰다. 스토커가 생길 것 같았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고는 하는데, 사실 그도 적잖이 놀란듯한 표정이었다. 명수는 얼굴에 범벅이 된 눈물을 서둘러 닦아낸 뒤 그에게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성규는, 그 말에 별다른 대답 없이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혼자 있기 무섭다고 한 거였어?" "..네." 말을, 하지.. 성규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눈물은 멈추었지만, 훌쩍거림은 여전했다. 조심스레 스토킹 당한 지 얼마나 되었냐고 묻자, 명수는 대충 한 달쯤 된것 같다고 답했다. "그동안 대체 뭐했어, 신고하려고 시도라도 하지." "..아까 말했잖아요. 신고하려고 하니까 막 들어오려고 했다니깐." "…" 그래도, 팀장님이라서 다행이에요. 누가 들어왔을 때,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팀장님인거 보고, 안심되기도 하고, 되려 무섭기도 했는데.. 아무튼 다행이에요. 명수가 애써 입꼬리를 올린다. 성규는 그 모습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 그닥 땡기지 않아 아침밥은 챙겨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곧, 그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주린 배가 당겨왔다. 명수는 시간을 확인했다가, 편의점에서라도 밥을 먹는 것은 완전히 포기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나온다. 바보같이 또 늦잠을 잤다. 성규는 어젯밤, 밤늦게까지 함께 있어주다 돌아갔고 저는 혼자서 자느라 진땀을 다 뺐다. 아무래도 집에 놈이 들어온 적이 있다 보니,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성규와 함께 비밀번호를 바꾸기야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불안한 거였다. 이미 예전 비밀번호도 손쉽게 알아낸 놈이니까.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습관이다. 명수는 자연스레 고개를 양쪽으로 틀었다가,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지하철을 놓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팀장은 왠지 저를 이해해 줄 것만 같지만. 아닌가, 그 차가운 특유의 표정으로 또 핀잔주려나. 푸욱, 한숨을 쉬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얇은 발목이 부러질까 아슬아슬하다. 열차가 들어오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명수는 한 발짝 물러났다. 빠른 속도로 제 앞에 도착한 지하철에 잽싸게 올라탔다. 운 좋게도 발견한 맨 끝 빈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금세 옆자리가 메워지고, 앞에도 누군가 선다. 명수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하철 안은 조용한 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수많은 사람사이를 헤쳤다. 어깨를 자꾸 툭, 툭 치는 사람들에 밀려나지만 꿋꿋이 앞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촉박했다. 조금이라도 더 지체되면, 늦을 지경이었다. 명수는 지하철역에서 나와 회사를 향해 걸었다. 커다란 건물이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 중에 혹여나 놈이 지나가면서 사진을 찍을까, 옆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을 좀 만나니, 좀 안정된 느낌이다. 그렇게 까지 불안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살짝 살짝 숙이며, 인사하며 들어섰다. 성규의 시선이 흘끗 닿았다가 떨어진다. 명수는 그에게도 짧게 인사한 뒤, 서둘러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옆자리 성열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안녕, 이라고 말했다. 명수 또한 웃으며 안녕이라 답했다. 컴퓨터를 부팅한 뒤, 반대편 상사의 메일을 보냈다는 말에 메일부터 확인했다. 이번 프로젝트 관련 파일을 다운하고, 미리 USB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메일함 속에 도착해있는 몇 개의 스팸메일을 지우다가, 또다시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메일. 제목은 딱히 없었다. 왠지, 놈이 보냈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 명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 메일을 열었다. 이런 거에 딱히 무서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야, 이제 아무렇지 않게 확인할 수 있겠지, 아무리 충격적인 장면을 보아도.. ..또, 집 안에 들어왔구나. 이번에는 더 심하게.. 더이상 보고싶지 않아 메일을 지웠다. 지우는 순간 증거, 라는 것이 떠올라 아차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핏 보면 그냥 검정색인 그 사진은, 자세히 보면 밤에 약간의 조명으로만 찍힌 사진이었다. 배경은 저의 집, 구체적인 장소는 침대 위. 메일이 도착한 날짜는, 허리가 아파 죽을 것 같던, 그날.. 끙, 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지끈거려오는 이마를 짚고 눈을 잠시 감았다. 옆에서 성열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오니 그저 고개를 젓는다. 저쪽에서는 잠깐 성규의 시선도 닿았다. 이쯤 되어서, 정말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토록 저를 괴롭히는지. 물론 궁금하기야 처음부터 궁금했지만, 이제는 정말, 정말 알고 싶었다. 전에는 무시해버리고 싶다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얼굴 좀 보고 싶었다. 명수는 모니터를 끄고, 책상 위에 조용히 엎드렸다. 주린 배가 이제는 쓰렸다. * "김명수씨, 어젠 좀 괜찮았어요?" "네? 아, 네. 괜찮았어요." "..다행이네. 또 무슨 일 생기면 불러요, 바로 가 줄 테니까." 명수는 그에게 고맙다며 인사했다. 사내라 그런지, 그의 어투는 다시 딱딱해졌고 존칭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규와 명수의 대화를 주의 깊게 보던 성열이 명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벌써 몇 번째인지, 또 무슨 일 있냐며 물어오는 그다. 명수는 별일 아니라고 웃으며 답했고, 성열은 삐친 척 입술을 쭉 내밀고 그의 앞에 섰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아니지? "아니야, 숨기긴 뭘 숨겨." "무슨 일 있으면 이 형한테 말해. 응?" "알았어어-" 성열이 고개를 돌리자, 명수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천천히 사라졌다. 눈을 치켜뜨고 업무에 집중하던 그는, 스토커를 반드시 보겠다고 다짐한 뒤였다. * 눈치는 좀 보이지만, 성규의 도움으로 한 칼퇴근에 기분은 좋았다. 서둘러 회사를 나온 명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 저번에 들러 컵라면을 샀던 편의점이 눈에 뜨이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그닥 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저기서 폴라로이드 사진이 찍힌 바 있었기에. 그는 거의 뛰다시피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급하게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는 시간이 지루하다. 제 옆에 선 조그만 여자아이는 사탕을 쪽쪽 빨고 있다. 명수는 아이를 살짝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느릿느릿 열리는 문 사이로 재빨리 내렸다. 서늘한 복도를 가로질러 몸으로 살짝 가리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여자아이는 옆집에 사는 모양인지, 옆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보는데. 명수는 잠깐 멈추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 아이는 놈을 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치듯 든다. 하지만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회사에서 찾아보니, 두려움에 삭제한 줄만 알았던 놈의 번호는 최근 기록에 그대로였다. 이 번호가 놈의 진짜 번호일지, 남의 명의를 도용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연락이 닿기를 기도했다. 놈을 한번 도발해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쳐들어오겠다고 협박하면 부를 사람도 있겠다, 무서울 것이 없다. 생각해보면 놈이라고 해서 엄청난 힘을 갖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던거다. 명수는 옷부터 갈아입은 뒤, 거실에 앉아 놈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예 없는 번호라고 할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연결음이 갔다. ..연결음이 끊겼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명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너, 스토커 맞지. -뭐야, 이젠 너가 먼저 전화까지 해주는 거야? 이질감 드는 변조된 목소리. 저번과 같다. "신고할 거야, 내일. 퇴근하자마자 경찰서로 가려고." -흠, 지금 당장 집으로 와달라고 아우성 치는 건가? "그럴지도. 신고만 하면, 넌 이제 끝이야." -글쎄, 지금 너에게 증거는 없다고 봐. 그의 말에 명수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 한 번만 만나. -내가 보고싶어? "비겁하게 숨지마." -글쎄.. 길어지는 대화가 싫다. 놈의 목소리는 원래 듣기가 내키지는 않았는데, 변조까지 되었으니 듣기 좋을 리가 있나. 명수는 한 번 더 놈에게 만나자는 제안을 했고, 만나준다면 신고는 보류하겠다고 말했다. 반대편 측에서도 신고를 막을 방법을 아직 생각해 두지 않은 모양인지, 놈은 고민하는 듯 했다. 명수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얼굴 한 번만 보면 된다고. 누군지만 알자고, 제발. -그런데 말이야, 어떤 멍청한 스토커가 자기 신상을 밝히지? "스토커와 통화를 하는 나 같은 사람도 별로 없을 거야." 슬슬 목소리가 떨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옆에 누구라도 있으면 좀 편하겠는데, 혼자 이런 짓을 하려다 보니 아무래도 긴장되는 게 사실이다. 그에 비해 놈의 목소리는 너무도 여유로웠다. 마치 모든 상황을 모두 꿰뚫고 있는 듯. -좋아, 만나. 내일, 자정에 너희 집으로 갈게. "..그래." 전화는 반대편에서 툭 끊겼다. 명수는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식은땀을 흘려서 그런가, 집안이 상당히 춥게 느껴졌다. 명수는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대었다. 내일 밤 12시, 놈은 찾아올 것이다. 04 아침부터 우편함에 꽂혀있는 흰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명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봉투를 챙겨 아파트를 나왔다. 겉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흰 봉투는, 딱 봐도 놈이 보낸 것이었다. 물론 놈이 늘 흰봉투를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겉에 아무것도 안쓰였으니까, 그는 그렇게 예상했다. 지하철은 어제보다 더 붐비는 듯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 멍을 때리게 됐다. 오늘 밤 열두 시, 라는 말만 자꾸 떠오른다. 놈은 이미, 제 생활 속의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 생각이야, 전에도 한 바 있었지만 요즘 들어 그런 것들을 자꾸만 자각하게 되었다.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잔뜩 날리는 먼지에 기침이 났다. 연속된 기침에 따끔거리는 목을 감싸고 서둘러 눅눅한 지하철역을 나왔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못했다. 하늘 가득 회색 구름이 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느꼈던대로, 눅눅하다. 피부가 끈적끈적한 느낌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두운 건 되게 싫어했던 것 같은데. 이런 날은 어두워지기도 또 빨리 어두워져서 정말 싫어했었다. 그 버릇은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모양이다. 오늘은 그닥 늦은 것도 아니지만, 발걸음을 서두른다. 스토킹을 당하기 시작한 뒤부터 밖에서 노다니는게 내키지가 않는다. 더군나나 오늘은, 놈에 관한 생각을 한시도 떨칠 수 없을 것만 같다. 열두 시, 약속 아닌 약속을 잡아버린 터라. 놈이 딱히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지 않더라도 오히려 제가 피해이니 올 수 밖엔 없겠지. 어떤 꼼수를 쓰느냐가 문제인데.. "김명수씨, 늦었네." "..예? …야, 너.." "크큭, 이런 거에 놀라기는 여전해." 아침부터 장난을 걸어오는 성열의 등을 아프지 않게 툭 친다. 그런데도 아프다며 엄살 부리는 것 보니 그도 여전하다. 함께 처음 입사할 때부터, 엄살은 알아줬다. 명수는 오랜만에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어제 받은 프로젝트 관련자료를 다 정리하지 못했다. 오늘 퇴근 전까지만 제출하면 되니까, 그렇게 급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야야, 명수." "왜." "오늘 한잔, 콜?" "..오늘은 안돼, 빨리 집에 가야 해." "왜, 자취하는 놈이." 단칼에 거절하니 성열의 표정이 뾰로통하다. 일이 있다고, 몇 번이나 달래주고 나서야 그는 아이처럼 화를 풀었다. 명수는 금세 다른 입사동기들과 약속을 잡는 그의 모습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쉽게 다른사람 꼬드길거면, 뭣하러 귀찮게 그토록 삐진척했는지. 저로서는 좀 이해가 가지않는, 성열의 흔한 모습이었다. 곧 성열은 오늘 회식 있을 것같다는 성규의 말에, 시무룩해져서는 자리로 돌아왔다. 명수는 고개를 돌렸다. * "팀장님, 파일 하나 보냈으니까,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네. 근데 김명수씨." 스토커는, 어떻게 됐어? 그의 물음에 명수는 그저 어깨만 으쓱한다. 혹시요, 오늘 제가 전화하면 바로 와주실수 있어요? …당연하지, 전화만 해. ..알았어요, 늘 감사드려요. 얼굴에 철판깔고 회식까지 빼먹으며 퇴근하는 명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규가 깊은 숨을 내쉰다. 오늘은, 종일 휴대폰만 들고 있어야 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며. 명수는 엘리베이터에 타며, 잠시 묻어두었던 흰 봉투를 꺼냈다. 지잉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며, 종이의 윗부분을 조심스레 뜯었다. 그러다가, 뭘 이런걸 또 조심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가 봉투를 벌려 내용물을 꺼냈다. 예상하던 대로, 매끈한 사진 뭉치. 왠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진을 넘겼다. 빳빳한 사진들은 하나같이 저의 모습을 담고있다. 이번에는 좀 더 강도가 높아져, 집 안의 모습을 스스럼없이 찍어온듯 했다. 게다가 뒤에는 짤막한 메시지까지, 허이구. 아주 정성을 가득 담았다. 저의 주방에서 라면 끓이는 사진이 있었는데, 정말 어이가 없다. 하다 하다 주방 사용이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주… 정신상태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한장 더 넘기니, 어제 본 사진과 비슷한 것이 나왔다. 얼핏 보면 검은색 사진. 명수는 눈을 찌푸려 자세히 살폈다. 저의 자는 모습을 위에서 찍은 모습인데, 어.. 어떤 사진인지 이해한 명수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사진을 넘겼다. 나머지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이 사진들에 양호하다는 말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웃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사진들을 쭉 넘기다가 봉투에 도로 넣었다. 어차피 당연히 신고는 할 생각이었다. 놈은 바보같이 또 증거물만 제공해준 셈이다. 그것도 이렇게 강력한. 명수는 자연스레 도어락을 풀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찬 손잡이를 잡아내리고 문을 잡아열었다. 좁아서 그런지, 약간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명수는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앉았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이제 곧 열두 시가 될 것이다. 명수는 애써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도 무서운 건 사실이었고, 놈의 앞에 당당히 설 자신이 없다. 그래도, 그렇지 않는다면 놈의 행위는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질 것이고, 저는 놈에게 힘없이 당할 뿐이겠지. 명수는 이를 악물고 각오했다. 되도록이면 놈을 앞에서 대면하고, 만일의 상황에는 바로 옷장에 숨어 시간을 끌며, 성규에게 연락을해야겠다. 열두 시, 일 분전. 명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앉아있던 몸을 미리 일으켰다. 먼저 인터폰 앞에 서 있으려는데 문자 두 개가 도착했다. 성규의 문자. -너, 오늘 스토커 만나기로 했어? 그건 어떻게 알았을까. -만나지 마. 위험해. 일단 내가 당장 갈 테니까, 문 열어 주지 마. 절대. 그가 보낸 글을 읽고 고민하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멈춘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신경은 온통 현관문을 향해 곤두섰다. 다짐한 대로라면 당당히 문을 열었겠지만, 성규의 문자를 받으니 뭔가 무서웠다. 용기가 나질 않았다. 우선 계획했던 대로, 놈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되니까. 인터폰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뻗었다. 손으로는 계속 성규가 문자를 보내고 있는 모양인지 자꾸 진동이 느껴졌고, 명수는 그것을 손에 꽉 쥔 채, 너무 떨려 저린 손가락을 잠시 접었다가 폈다. 문밖에서는 다시금 똑똑, 소리가 들렸다. 명수는 그 틈을 타, 버튼을 눌렀다. 검정색이 아닌, 복도의 모습이 아주 잠깐, 잠깐 보였다. 놈이 바로 손가락으로 가리는 탓에 잘 보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히 보았다. 놈이 들고 있던 둔기. 뒤에서 한 대만 제대로 맞으면 쉽게 기절할 것 같았다. 명수는 휴대폰을 꽉 쥐고, 드레스룸으로 달렸다. 놈은 지금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집 안에 울려 퍼지는 도어락의 기계음에 마음이 급박해졌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드레스룸의 옷장 문을 열었다. 걸려있는 옷들을 들이밀고 안에 들어선 뒤 문을 닫는다. 비밀번호가 틀려 다시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날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놈은 이미 들어왔겠지. 명수는 몸을 타고 오르는 공포심을 눌러 참으며 휴대폰을 보았다.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성규의 문자가 가득하다. 명수는 조용히 문자를 보냈다. -도와줘요. 휴대폰을 양손 사이에 쥐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놈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들고 온 둔기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듯 했다. 명수는 최대한 옷장 깊숙히 파고들었다. 무서워. 너무 무서웠다. 놈이 흉기를 들고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저가 멍청했다. 놈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왜 이렇게 안 와, 무서운데.. 쾅, 쾅. 옷장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턱 막히며 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안 그러려고 해도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명수는, 이를 악물고 휴대폰을 무음모드로 바꾸었다. 이렇게, 저 둔기에 맞아 정신을 잃을거라면.. 차라리, 얼굴보고 죽던 기절하던 하는게 낫지 않을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옷장 속으로 빛 한줄기가 새어 들어오는 순간, 명수는 몸을 날려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저 놈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토록 저를 괴롭히는 인간이 누군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큰 소음, 그리고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 명수는 머리의 고통에 뒤로 쓰러지며, 놈의 얼굴을 똑똑히 새겼다. 비록 모자도 쓰고, 마스크도 썼지만,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성규가 구하러 올 텐데, 라는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놈은 자비가 없었고, 명수는 잇새 사이로 거친 숨을 내쉬며 감기 싫은 눈을 감을 수밖엔 없었다. 성열은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물었다. 싸한 담배의 맛이 오랜만이라 반갑다. 창문 밖으로 연기를 뿜으며, 한 손으로는 핸들을 돌렸다. 늘 부드럽게 돌아갔는데, 오늘따라 뻑뻑한 느낌이 든다. 차 내부에는 피 냄새가 진동했고, 그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가 창문을 전부 열었다. 피는 싫었다. 갑자기 튀어나와 놀란 바람에, 그만 힘 조절에 실수하고 말았다. 하지만 뭐,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겠지, 지혈도 해줬으니까. 그는 시선을 잠깐 내려 조수석을 보았다. 조수석에는 명수에게 천천히 보내주기 위해 뽑아둔 사진들이 가득하다. 흠, 저것들도 이제 쓸모없으려나- 이제 실물이 늘 곁에 있을테니까. 뒷자리에서 명수의 숨소리가 들렸다. 성열은 씨익 웃으며 뒷자리의 창문을 다시 닫았다. 혹여나 그가 추울라. 추워서 움츠리는 모습 또한 예쁘겠지만, 딱히 지금은 추위에 떨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반쯤 타버린 담배를 차 잿더리에 비벼 끈 그는, 등을 탁 기대어 양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거친 숨의 성규는 멍하니 명수의 집 안에 발을 디뎠다. 현관문이 활짝 열렸을 때부터 좋지 못한 생각들이 파고들었고, 차례로 열린 드레스룸과 옷장, 그리고 그 앞의 약간의 혈흔을 보니 그 생각들은 성규를 지배했다. 너무 늦어버렸다. 성열이 회식자리를 일찍 뜨며 말했었다. 이제 가봐야겠다고. 저가 꾸준히 관찰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 앙칼지게 얼굴 한번 보자고 약속 잡았다면서. 이제, 그 성격 고쳐놓고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겠다느니, 취해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당을 나서는 그는 멀쩡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럴 시간조차도 없다는 거 잘 아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부터가 막막했다. 신고부터 해야 하나. 현관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성규의 앞에 누군가 섰다. 성규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야에 조그만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아저씨가 이 집에 사는 오빠 끌고 갔어요." "..어?" "얼마 안됐는데. 그 오빠, 안에서 막 살려달라고 소리쳤어요." 되게, 키 큰 아저씨였는데.. 여자아이의 말을 멍하니 듣던 성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대학생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도 저는 그를 지켜주지 못했고, 명수는 저를 떠났다.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그런데.. 또, 지켜주지 못했어.. 소리없이 떨어지는 그의 눈물을, 여자아이는 멍하니 내려다보다 뒤돌아 저의 집으로 돌아갔다. 성규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제 시야를 가리는 차가운 복도는, 명수가 몇 번이고 지나며 공포를 느꼈던 장소였을 것이다. 성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명수의 자리는 비었다. 늘 늦게 오더라도 시간은 지키던 그였는데, 한참이 지나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성규는 담배를 피우러 일어나는 성열을 따라 일어났다. 그대로 흡연실에 들어가는 그를 무작정 붙잡고 얼굴에 주먹을 내리찍는다. 갑작스러운 그의 폭력에 성열의 얼굴에 당황이 묻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규는 주먹을 계속 내리꽂았다. "팀장님, 지금, 뭐하시는..!" "김명수 어딨어." "뭐야, 팀장님도 우리 명수.." "우리 명수라고 부르지 마." 역겨워. 성규가 성열을 내동댕이친 뒤, 더럽다는 듯 그의 멱살을 쥐었던 손을 털었다.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쓸어내는 성열의 표정 또한 좋지 못했다. 성규는 일어나 서서 성열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마지막이야. 김명수, 어딨어. "명수는 지금, 저희 집에서 잘 쉬고 있죠." "…" 성열의 미소에, 성규는 그를 사납게 내려다보다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 그는 여러모로 귀여운 행동을 했다. 그냥 메일에 떠보듯 사귈 때, 라고 해줬더니 알아서 옛 애인들을 골라 의심하고.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는 좀 위험하게, 목소리도 그대로 내었고 사진까지 주워줬는데 알아채지 못했다, 바보같이. 게다가 먼저 만나자면서 아이처럼 옷장 속에 숨고. 귀여웠던 그의 행동을 회상하며, 성열은 열쇠를 꽂아 방문을 열었다. "명수야." "…" "머리는, 괜찮아? 아프면 말하구." 이불 두 장과 베개가 다인 방에, 멍하니 앉아 성열을 올려다보는 명수의 눈이 공허하다. 아직 씻겨주지를 못해 피가 덕지덕지 묻은 머리카락이 까슬까슬했다. 명수의 앞에 쪼그려 앉아 살짝 웃던 성열은, 눈물이 말라붙은 명수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쓸어낸 볼에는, 다시금 눈물이 흘렀다. "울어도, 예쁘네." "…" 원망스럽게 저를 쳐다본다. 앙칼진 눈동자에 저가 온전히 담겼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성열은 명수의 흰 살을 쓸어내다가, 벌떡 일어나 열쇠 두 개를 짤랑거렸다. 명수의 시선이 그것을 따랐다. 온종일 이 방에 갇혀있었던 그로서는, 이 열쇠가 간절할 터였다. "나가고싶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성열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김성규 있잖아.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꽉 꽉 막혔다니까, 사람이. 오늘만 해도,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는 거 있지? 짜증 나서 진짜. 어차피 여기 찾아오지도 못할 놈이 말이야. 멍하니 그의 말을 듣던 명수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성열의 시선은 그의 눈동자만을 따랐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성열은, 말 없이 명수의 눈동자를 쫒았다. 눈동자에 비친 사람의 모습이, 움직인다. 성열이 손에 둔기를 들고 뒤를 돌았다. fin. + 이것참.. 앞에 숫자를 붙이기가 민망하리만치 짧네요ㅋㅋㅋㅋㅋ 읽어주신 그대들 감쟈드리구요/하트/ 이 파일은 저기 어디 논두렁에 던져주셔도 됩니다! 배포는 사랑이에요/또 하트/